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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 48 : 크리스마스 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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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한남관광개발
작성일20-01-02 13:56 조회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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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와 나는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집안 어르신들의 약속으로 백년가약이 운명처럼 결정된 특별한 사이였다. 물론 절친했던 양가 어른들이 취중에 한 약속이었기에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어른들의 말이 마냥 허투루만 들렸을 리 없었다. 나는 괜히 정이 앞에서는 의젓해 보이고 싶었고, 여자아이들과 놀 때는 정이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해 했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 나는 정이와 펜팔을 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편지는 자연스럽게 연애편지로 바뀌어갔다. 우리 고향 마을엔 연인들이 징검다리를 건널 때 연인들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볼 줄 아는 신통한 돌이 있어서 이 돌을 짚으면 냇물에 빠져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있었다. 나는 이끼가 잔뜩 돋은 그 돌 위로 정이를 업고 내를 건너보고 싶었다. 돌이 명하는 대로 제꺽 균형을 잃고 물속으로 뛰어들면 우리는 옷을 말리며 한참을 냇가에서 함께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가빠오고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었다.

 

소년기의 이런 판타지가 구체화된 것이 나만의 특별한 우표수집책이었다. 내가 특별히 아끼던 그 책엔 한정판 기념 발매 우표들과 디자인이 뛰어난 우표들, 그리고 어렵게 구한 희귀본이 빼곡했다. 수집벽이 얼마나 과했는지 한정판 우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우체국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린 일도 있었다. 정이에게 붙이는 편지는 뭔가 격이 달라야 했고, 겉봉에서부터 구별이 되는 특수한 빛을 뿜어내고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우표는 우리 사이에 놓인 징검돌과 같은 것이었다.

 

내 우표수집책의 목차엔 크리스마스 실(Christmas seal)’이 따로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강제로 판매하는 바람에 불만이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실이 나오면 기분이 좋아졌다. 크리스마스 실은 겨울방학의 전령이었고 그것은 곧 귀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이를 만날 기대로 달뜬 나는 동생들을 모아 놓고 사업 발표를 했다. 우리가 직접 카드를 만들어서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에 쓴다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좋아할 것이라는 연설이었다. 그 중의 가장 예쁜 카드 하나는 정이에게 보낼 것이었고, 수익금의 일부는 정이의 선물을 사는 데 보탤 것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나의 어린 누이들은 존경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리라.

 

그 야심찬 사업의 결과물은 늘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형편없는 결과물에 불우이웃돕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처럼 곱은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동동거리고 있는 누이들에 대한 죄의식까지 더해지면 그건 사업이 아니라 차라리 극형과 같았다. 저임금과 겨울 거리의 혹한 같은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카드 제작 사업은 몇 해를 더 이어갔다.


영화 <아멜리에>엔 술집에서 서빙을 하며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여자가 나온다. 어느 날 여자는 우연히 벽의 튀어나온 타일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40년 전 그 집에서 살았던 소년의 보물 상자를 발견한다.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면 나는 그 옛날의 소년이 보물상자를 되찾는 장면을 들겠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보물상자를 돌려받은 순간 사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 작은 보물상자 속에는 장난감들뿐만 아니라 사이클 대회에서 1등을 했던 일과 가족들에 관한 자잘한 이야기들 같은, 그 어떤 보물도 줄 수 없는 추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더께가 앉은 일상이 추억의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사내는 감격에 찬 말을 남긴다. “인생은 너무나 신기하단 말이지. 나는 수많은 세월을 살았는데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상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나의 보물상자를 어떻게 되찾을까. 우표수집책은 어디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줄도 모르겠고, 크리스마스 실을 산 기억은 까마득하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실이 나오기는 나오는 건가. 검색창을 두드려보던 나는 하마터면 영화 속 의 사내처럼 눈물을 흘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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